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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탁 메쉬카트 교수,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발표문(번역본)

성찰하는사람 2008. 12. 3. 10:28
68학생운동의 국제적 확산과 초국가적 성격

Klaus Meschkat(클라우스 메쉬캇, 하노버 대학)


* 2008년 12월 2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주최로 개최된 간담회 자료입니다.


“1968” - 국제적 확산과 트랜스내셔널한 구조


제가 이곳에 현대사가와 사회학자로서 초대된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자 그 시대를 경험한 증인으로서 초대된 것인지 확실치 않다. 때로 시대를 직접 경험한 증인은 역사학자의 적이라고 말해지곤 한다. 특히나 소위 68세대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최대한 멋져보이게 하고 불편한 사실들은 침묵하며 과거를 낭만적으로 채색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 주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에 사로잡혀 있다. 즉 1968년을 깍아내리는 것은 주로 1970년대에 신스탈린주의적 조직의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의 지평이 규정되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독일에서는 옛 K그룹의 활동가들이 쓴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들은 그때까지의 저항운동의 주된 상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 하였던 것이다.1)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편견없이 대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자전적 배경을 공개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베를린 자유대학에 입학함과 거의 동시에 1954년에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 (SDS)에 가입하였으며, 그 조직의 발전과정을 끝까지 경험하였고 특정한 단계, 예를 들어 사민당으로부터의 분리 등을 적극적으로 추동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68세대라기 보다는 58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SDS멤버였던 것이다.


SDS는 의심의 여지없이 1970년 초 해산할 때까지 독일 저항운동의 중심점이자 조직적 센터였고, 내가 이 조직의 오랜 회원이었다는 것은 1968에 대한 나의 해석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러한 참여가 학문적 객관성에 대한 노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당시 운동에 대한 평가에 있어 나는 대부분의 사항에 있어 나보다 훨씬 어린 현대사가 노버트 프라이(Norbert Frei)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1955년 출생으로서 60년대 저항운동에 적극적 참여자가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올해 1968에 대한 아마도 최고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


노버트 프라이 또한 50년대와 60년대 초의 역동적인 저항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1968을 파악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2) 이점은 제시된 테마를 다룸에 있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일 것이다. 즉 여러 국가들에서의 오직 1967/68년의 사건들만을 열거하면서 힘들게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국제적 성격을 거의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숨결이 짧은 시각은 1968이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세계질서에 대한 전지구적인 정치적 문화적 대항프로젝트의 결집점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50년대 이래 “신좌파”의 형성과 보조를 맞추며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트랜스내셔널한 구조는 지금까지 국제적 측면에 관하여 나온 출판물 중에 단지 아주 소수의 경우에만 실제로 다루어졌고, 그마저도 전지구적 측면에 관한 책들도 사례연구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한 정도인데, 여기서 강조점은 각국의 특수성에 놓여있고 트랜스내셔널한 특징들은 단지 주변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다.3) 통상적으로 하는 식으로 60년대의 상이한 각국의 저항운동의 파노라마를 늘어놓는 대신에, 나는 다른 방식을 택하고자 한다. 즉, 독일 SDS와 이 조직의 미국내 신좌파와의 관계를 사례로 삼아, 국제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독립적인 정치적 입장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독일에서 독립적인 좌파의 출현과 발전은 처음부터 국제적 관점을 획득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차대전 이후 경제기적의 시기에 사람들은 국내적 틀 내에서 사회적 논쟁을 시작하여 그 다음 단계로 국제적 연계를 만들어내려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신좌파의 형성에는 국제적 맥락이 그 시초에 놓여 있었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냉전이라는 사고의 감옥을 부수고 나와, 자유세계냐 소비에트식 전체주의냐라는 (다르게 표현하자면 미국제국주의 대 세계평화진영) 이미 주어진 양자택일의 강요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독과 특히 서베를린에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아직 사민당에 속해 있던 SDS의 회원으로서 우리는 동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스탈린주의적인 획일화로 인하여 미국의 지원으로 설립된 미국점령지역의 대학(서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단호하게 서방세계의 지도력을 편들라는 요구가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쳐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50년대 초의 후기 스탈린주의는 두드러지게 혐오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소련영향력 하의 국가들에서 지도적인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공개재판은 심지어 반유대주의적인 뉘앙스를 띠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1950년에 CIA의 지원을 받은 미국의 프로파간다는 “문화의 자유를 위한 대회”를 재정지원하였는데, 공산주의로부터 전향한 저명한 지식인들이 소비에트적 지배체제의 비인간적 측면에 대해 증언하였다.4)


하지만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로 인해 반드시 맹목적인 반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서양 저편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즉, 당시, 그러니까 50년대 초에 반공주의자 죠세프 맥카시의 사상검열과 선동은 20세기 정신세계의 지도적 인사들을 미국으로부터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만, 베르톨드 브레히트, 챨리 채플린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의 방향설정은 당시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유럽과 미국의 언론이 냉전의 선전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대안적인 정보소스에 접근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미국에서 나온 거의 알려지지 않은 I.F.Stones Weekly 라고 하는 미국독립 언론인들의 통신이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단순히 소련의 팽창정책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국의 전쟁수행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통해 또한 우리는 여러 사건들의 배경을 알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195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 수상 Mossadegh에 대한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나, 1954년에 진보적인 대통령 Arbenz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쫒겨난 과테말라에서의 반혁명의 배경 등이 그것이다.


다사다난했던 1956년은 “신좌파”의 등장과 정치적 방향설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3월에 후루시쵸프는 20차 공산당대회에서 자신의 그 유명한 비밀연설을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스탈린의 범죄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고, 그것은 우리 중 다수에게 소련이 자신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의 유산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여기서 헝가리의 10월이 일어났다. 공산당 지배에 반하여 일어난 민중봉기를 진압함으로써 그 결과 서구의 공산당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탈당하였는데, 특히 영국에서 그러하였다. 영국에서 공산당을 탈당한 사람들은 반동적인 반공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좌파사회주의 그룹을 만들어냈는데,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New Left Review"가 바로 이들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헝가리 민중봉기와 같은 시기에 영국-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집트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하였다. 이것은 공공연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의 최후의 사례 중의 하나였다. 독립적인 좌파의 의식형성의 초기에 있어 반식민지 투쟁과의 일체감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거리두기와 더불어 중요한 요소였고, 이러한 신좌파가 무엇보다 영국에서 조직적인 결집점을 찾았다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탈식민화과정과 (영국의) 핵무장에 대한 고집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세계강대국의 자리에서 점차 밀려나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식민지의 상실을 최소한 핵무기 보유로 보상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신좌파는 바로 이러한 핵무장에 대항하여 조항운동을 전개하였고, 그들은 과거 인도에서의 반식민주의 운동의 시민불복종의 방법론을 채용하여 반핵운동에 적용하였던 것이다.5)


독일에서 반식민주의 투쟁과의 연계는 알제리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서독의 몇몇 독립좌파 행동가들이 프랑스의 식민전쟁에 대항하여 개입하였다. 이들은 프랑스의 야만적인 전쟁수행에 반대하는 시위를 넘어 실제적인 연대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독일출신 외인용병들의 탈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6)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미 독일의 제삼세계 연대운동을 지금까지 따라다니는 문제가 드러났다. 연대란 해방운동이 스스로 요구하는 단순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했지,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그들의 내부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제리의 독립 이후 해방운동 내부에서 노선투쟁이 벌어지고 억압적인 군사정부가 알제리의 해방된 사회에 대한 모든 꿈을 파괴해버리자 충격과 거리두기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시적이고 가장 끔찍한 형태로서의 폭력은 점점 더 식민전쟁과 신식민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반혁명 진영의 폭력으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즉, 알제리 전쟁 이후 콩고에서 Patrice Lumumba의 암살이 일어나고,7) 그 이후에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내 60년대 중반 옛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함께 베트남 전쟁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최근에 악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서독 좌파들의 특별한 반미정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8) 독일 SDS가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 반전운동과의 공명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독일 SDS의 몇몇 적극적인 회원들이 당시 학생이나 강사로서 미국에 머물면서 SDS의 잡지 “신비평(Neue Kritik)"에 미국의 신좌파, 즉 시민권운동, 미국 SDS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의 발전, 그리고 전투적인 흑인운동에 대해 기고하였다. 이미 1962년에 독일 SDS의 회원이었던 Michael Vester는 미국 SDS의 강령선언이었던 그 유명한 포트 휴런 선언의 작성에 참여하였다. 


독일과 미국의 신좌파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저작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수뇌로서 미국망명에서 독일로 돌아온 막스 호르크하이머나 테오도어 아도르노와는 달리 마르쿠제는 미국에 머물렀고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고에 있으면서 당시 그곳 저항운동의 가장 영향력있는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자주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 SDS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9) 마르쿠제에 대한 지향성이 미국과 독일의 저항운동을 하나로 묶어 주었으며, 그는 나아가 다른 지역에도 알려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1967년 여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연“유토피아의 종언 Das Ende der Utopie"이 1968년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멕시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책들이 멕시코의 학생운동에서도 받아들여졌으리라고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내셔널한 특징은 단지 마르쿠제나 밀즈 (C. Wright Mills) 같은 중요한 사상가들의 세계적인 수용을 통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저항운동의 실천 속에는 또한 국가에서 국가로의 전이가 있었다. 간디의 시민불복종 운동형태가 영국의 반핵운동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과 같이, 독일 학생운동은 teach-in, sit-in 과 같은 미국의 저항형태를 수용하였다. 악의적으로 주장되는 독일 신좌파의 “반미주의”와는 한참 동떨어지게도 우리는 오히려 미국에서 실험되고 아예 미국식 이름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진 미국식 저항형태의 모방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미국과 독일의 SDS의 입장은 베트남 전쟁의 점증하는 야만성과 함께 내용적으로도 같은 방향으로 발전하였는데, 저항의 과격화라는 의미에서 그러하였다. 미국에 의해 전세계에서 추진되고 있던 정책의 과도한 폭력성에 비추어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그 어떠한 대응폭력도 정당한 것으로 비춰졌다. 즉, 억압에 대항하여 손에 무기를 들고 봉기를 한 사람은 대도시의 신좌파들의 연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서독에서 이것은 자기 정부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는데, 당시 정부는 빌리 브란트를 외무장관으로 한 대연정 시기였고, 후에 그가 수상이었을 때도 정부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지지함은 물론 나토 동맹국이었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전쟁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미국의 반전운동이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즉, 미국에서 징집통지서를 불태워버렸던 것처럼 유럽에서도 미제국주의의 전쟁장치를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어야 했다. 이것이 서독과 서베를린에서 구체적으로 의미했던 바는 눈앞에 다가온 베트남에서의 전쟁임무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미국 GI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은 비폭력적이었지만, 오직 비합법적으로만 조직할 수 있는 것이었다.10)


여기서 폭력에 관한 논의를 다루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40주년인 올해 많은 출판물들에서 이 문제가 왜곡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언급한 Götz Aly에 따르면,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었던 청소년들은 전후 평화로운 독일의 복지사회에서 원래 반항을 일으킬 아무런 근거가 없었는데, 우연히도 베트남 전쟁을 만나게 되고 이것을 자신들의 난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오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신좌파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점이 반혁명세력의 세계적인 폭력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에 대항한 대도시에서의 저항은 비슷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폭력의 과다를 참을 수 없다는 의식을 국민들 대다수에게 깨우치고, 여론조작의 독점을 분쇄하며, 그리하여 파멸적인 전쟁의 조직자들과 폭력의 우두머리들과의 자기 정부의 공모관계의 기반을 허물려는 매우 어려운 시도였던 것이다. 냉전의 우민화 도구11)에 맞서서 대항여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즉, 전통적인 항의데모 외에 구태의연하지 않은 비폭력적 저항방법이 그것인데, 이것은 연좌농성부터 산책시위라는 새로운 항의형태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면서 부분적으로는 합법성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었지만, 철저히 민주적인 것이었다.12)


이렇게 폭로되고 비웃음을 사게 된 자들의 반응은 1967년 6월 2일 이란 국왕의 독일방문에 즈음하여 벌어진 데모대에 가해진 적나라한 폭력이었다. 이란왕정체제의 반동적 성격에 대해 출판물과 대형행사를 통해 계몽된 학생들은 전제군주에 대항하여 가두에서 시위를 벌였다. 국가의 진압과정 중에 Benno Ohnesorg라는 학생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1967년 6월 2일의 사건은 국가에 대한 청년층 대다수의 태도를 변화시켰으며, 특히 오네조르크를 죽인 경찰관에 대한 무죄판결 후에 더욱 그러하였다.


트랜스내셔널한 연계라는 관점에서 독일 저항운동의 정점을 이룬 것은 1968년 2월 서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베트남회의였다. 이른바 자유세계의 최전방기지로서 베를린이 회의장소로 선택된 것은 미국 바깥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을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흑인들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좌파조직 대표자들이 베트남 해방전선의 깃발과 “모든 혁명주의자들의 의무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라는 모토 하에 TU(Technische Universität)에 집결하였다. 연설자 중에는 Peter Weiss 같은 저명한 작가를 비롯한 유럽 지성계의 뛰어난 대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회의와 그에 뒤이은 인상적인 항의행진을 통하여 미국의 전쟁수행에 대한 고발에서 시작하여 베트남 해방전선과의 연대에 이르는 과정이 완결되었다.


독일 SDS의 유명한 대변인인 루디 두취케는 베트남 회의 며칠 뒤 체코슬라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들의 인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에 대한 연대감을 표명하기 위해 프라하로 향했다. 베트남회의에는 모스크바 지향적인 정당과 청년조직들의 대표들도 참가하였기 때문에 두취케는 자신의 프라하 여행을 통해 반권위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베트남회의에 대한 서베를린에서의 반응은 시당국에 의해 조직된 시위였는데, 거기에서 연설자들은 시위학생들을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고, 한 젊은이가 루디 두취케와 비슷하게 생긴 탓에 린치를 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얼마 후 1968년 부활절에 두취케는 실제로 테러를 당하였고 머리에 여러발의 총알이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모면하였다. 1968년 부활절 시위는 무엇보다 Springer 언론그룹을 겨냥하였는데, 쉬프링어 그룹의 출판물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끊없는 비난선동을 통해 그러한 암살시도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쉬프링어의 신문수송 차량을 불태운 것과 같은 폭력적인 항의시위는 단지 상징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결코 폭력을 통한 권력장악 시도였거나 그것의 준비단계가 아니었다. 독일의 여러 도시와 전 세계에서 루디 두취케에게 연대를 표명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바로 이 점에서 운동의 트랜스내셔널한 성격이 인상적으로 드러났으며, 그것은 곧 이어 프랑스의 오월로 이어지게 된다.


1968년은 그 뿌리를 신좌파에 두고 있는 거대한 해방운동의 절정이었다. 그것의 세계적 성격은 여기서 하나의 사례로서 독일 SDS의 국제적 지향성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주로 미국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된 운동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13)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미국과 독일의 SDS는 다른 관점에서도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즉, 양 조직에 있어 1968년에 급격한 쇠퇴가 일어나면서 단기간 내에 자기파괴와 조직해체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프랑스의 5월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는 것이 큰 역할을 하였는데, 독일에서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상당부분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들이 전국적인 파업을 통해 지배체제를 그 근본까지 흔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평상시로의 복귀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타격을 받은 체제는 총선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바르샤바 조약군의 프라하 진군이 일어났고,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아는 바와 같이 소비에트 제국 종말의 시작이었다. 독립좌파는 이러한 침공과 그것의 정당화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반대를 표명하였다. 의회밖 반대파의 대표자로서 우리는 항의를 전달하기 위하여 서베를린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사대표부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공개적으로 소련의 행위를 인정하였다.


청년학생들의 상당부분을 신속하게 동원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가지게 된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배경 하에서 그러한 심대한 실망감은 새로운 혁명적 개입에 대한 비법을 찾아나서게 만들었다. 이제 독일에서 조직분야에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신좌파 해체 이후의 소규모 그룹들로서 그들은 신좌파의 통찰을 부정하고 그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였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진정으로 혁명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추종자들의 반권위주의적 태도를 벗겨내고 엄격한 규율에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새로운 조직들을 밝은 불빛에 비춰보면 모두 레닌주의적 당개념의 다양한 변종들이었다. 이것은 우선 다양한 마오주의 흐름에 귀속되거나, 또는 Ernst Thälmann의 유산을 부활시키는 것과 같은 독일 공산주의의 역사의 맥을 잇고자 했던 소위 K-Gruppe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 외에 한 때 반권위주의자였던 이들의 그룹으로서, 소위 현실사회주의라는 강력한 보루와 관계를 맺으면서 프라하의 개혁공산주의를 탱크로 밀어버렸던 권력에 자발적으로 봉사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 도시게릴라를 모범삼아 독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여타 모든 다른 그룹들의 혁명성을 능가하고자 했던 하나의 그룹이 있었는데, 이것은 레닌주의적 당개념을 군사적 요소로 보충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전혀 다른 유래에도 불구하고 미국 SDS에도 매우 유사한 발전과정이 있었다. 여기서는 두 가지 흐름이 조직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힘을 겨루었다. 진보노동파는 독특한 마오주의에 영감을 받은 흐름으로서 노동계급과 관련을 맺고자 한 분파이고, 다른 하나는 블랙 팬더 그룹의 아방가르드적 역할에 기대어 그것을 모범삼아 무장투쟁을 받아들이고 곧 바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웨더맨(Weathermen) 그룹이었다. 이들의 SDS로부터의 탈퇴와 더불어 소중한 힘이 상실되었고,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오랫동안 신좌파의 이념에 상응하는 민주적 구조를 가졌던 조직은 희생되었다. 그 자리에 각각 프롤레타리아와 중앙주의와 규율을 강조하는 미니 그룹들이 들어서고, 이들은 구좌파(사민주의건 볼쉐비즘이건)의 몰락을 가져왔던 경험을 되풀이하였다.


조직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1968-70년 사이에 하나의 단절이 일어났다. 신좌파를 대신하고자 했던 새로운 조직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거대한 해방운동의 부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조직들에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단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여러 예전의 간부들이 이제는 기존 질서의 열렬한 수호자가 된 것 뿐이다.


1968년에서 무엇이 남았는가라는 질문은 단지 조직에 대한 관점에서만 대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해방운동의 유산을 계속 담지하는 커다란 흐름들은 자기파괴적인 역사에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첫 번째로는 신여성운동을 들 수 있는데, 여성들이 해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면서 사회주의 학생연맹 내에서도 남성중심적인 의식과 구조에 저항한 60년대말 독일에서 운동의 고양을 경험한다. 페미니즘의 추동력은 새로운 정당의 건설로도 이어졌는데, 이 정당은 그 처음시기에 있어 전통적인 의미의 정당이 아니고자 하였고, 자연파괴에 대항한 투쟁을 통해 또한 1968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녹색당이 나중에 기성정당과 같은 보통의 정당이 되었느냐의 문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마지막으로 80년대의 평화운동의 동원 또한 신좌파와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좌파의 국제주의적 자극은 1968년을 넘어서 그리고 독일 SDS의 해산을 넘어서 영향을 미쳤다. 몇몇 회원들은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제삼세계의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동참하기 위하여 칠레로 향하였고, 이것은 내 스스로의 얘기이기도 하다.14)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칠레망명자들을 위한 광범한 지원이 있었다.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가 승리한 이후에도 연대운동과 조직들이 생겨났다.15) 라틴아메리카는 오늘날까지 중심에 서있는데, 베를린과 쾰른의 두 개의 뛰어난 월간지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대륙에 대한 관심을 활발하게 유지하고 있고, 현재에는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그리고 에쿠아도르의 진보적 정권들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현재와 관련하여 나는 Attac같은 조직을 포함한 세계화에 비판적인 운동이 아주 정당하게도 신좌파의 전통에 연결될 수 있다는 테제를 토론에 붙이고자 한다. 1968에 대한 회고적인 왜곡에 대항하여 다음의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즉, 전세계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사회포럼 (2001년 Porto Alegre로부터 시작하는)과의 협력을 통해 1968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즉 이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투쟁을 벌여야만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실질적인 경험의 교환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돗물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제삼세계에서의 성공사례 (볼리비아의 Cochabamba와 같은) 들은 유럽의 지자체에서도 용기를 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운동은 격렬한 대립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애틀에서의 WTO에 대항한 투쟁이나 제노아에서 G7/G8에 대항한 투쟁 그리고 독일의 Heiligendamm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적인 성공이 성취되었다. 하지만 수백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서 미국과 영국의 범죄적인 전쟁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우리들의 가장 심대한 패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신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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